'2007/12'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07/12/31 하나님께 충실함
  2. 2007/12/29 세상으로 흐르는 강 II
  3. 2007/12/28 세상으로 흐르는 강
  4. 2007/12/27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5. 2007/12/26 아가페
  6. 2007/12/25 목적과 수단
  7. 2007/12/25 T.S. Eliot, 동방박사의 여행 (Journey Of The Magi)
  8. 2007/12/24 크리스천과 자본주의
  9. 2007/12/22 [단어 연구] 은혜
  10. 2007/12/21 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하나님께 충실함

분류없음 2007/12/31 22:44
예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성격이 곧고 바른말 하기를 좋아해 "의로운 야고보" (James the Just) 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는 야고보서에서 점차 세속화하는 교회를 향해 이렇게 경고하였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약 4:4)

그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세상과 벗된다면 이는 하나님과 결혼관계에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결혼은 두 사람이 서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기로 결정하는 행위입니다. 만약에 내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어떤 대상을 더 사랑한다면, 이는 육체관계 여부와 상관 없이 부정이고, 결혼을 깨트리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부로 부르신 것은 우리가 그분을 가장 사랑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바쁘기에 하나님은 잊고, 우리의 생활에만 집착합니다. 직장 생활을 하고, 가정을 돌보고, 친구를 만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의 신부로서 얼마나 그분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7)


그분은 우리가 가족을 향한 사랑보다 그분을 더 사랑하기를 기대하시는 것이지요. 실제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식을 제사로 바치는 시험을 통과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우리의 마음이 가장 사랑해야 하는 대상은 하나님이고, 다른 어떠한 대상이라도 그분의 자리를 차지한다면, 이는 곧 제거해야 하는 우상이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식조차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면 안될찐대, 돈이나 직업의 성공 등 다른 대상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2007년을 보내며, 내 마음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했는지 되돌아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지는 않았나 반성해 볼 때, 하나님 앞아서 많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새로 시작되는 한 해는 더욱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커지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이상 부정을 저지르는 배우자가 아닌,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이 블로그를 찾는 모든 분들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커지는 한해를 맞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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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흐르는 강 II

분류없음 2007/12/29 16:5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우리 속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갑니다. 이 생수의 강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지요.

그렇다면 "세상에 생수의 강을 흘러보낸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저는 하나님의 임재의 향기를 발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머물 때, 그의 삶을 바뀝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나왔을 때, 그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났습니다 (출 34:29). 이는 그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였기에 그의 존재가 바뀌었기 때문이죠. 우리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면 삶이 바뀌면서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4)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에선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가 나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은 이러한 냄새를 맡을 때,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전통적인 표현을 쓴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상서로운 기운을 풍기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싸움이 멈추고 화해가 일어나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고, 혼동이 멈추고 질서가 회복되어야 정상입니다. 마치 매마른 땅에 비가 내리듯, 광야에 생수가 흘러가듯, 그리스도인이 없던 곳에 그리스도인이 가면 변화가 일어나야 정상이지요.

이러한 외적인 변화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생명의 주 (행 3:15)가 거하시고 활발하게 활동하실 때만 가능합니다. 즉, 하나님과 깊은 교제로 인해 내면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득할 때, 그 생명은 밖으로 흘러나가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살며 세상에 물들 것을 걱정하지만, 우리의 목표는 세상에 물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 하나님의 강을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자신이 가는 모든 곳에 전할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대표자로 살아가는 모든 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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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흐르는 강

분류없음 2007/12/28 14:54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에서 흘러나오는 강에 대해 네 번 언급합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 2:10)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시 46:4)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겔 47: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계 22:1)

즉, 성경은 하나님의 강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강으로 끝납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강은 생명의 근원인 물의 흐름입니다. 대부분의 생명체는 수분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고, 특히 커다란 생명체는 더욱 물을 의존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인 물은 바로 영적인 생명의 근원인 성령의 상징으로 볼 수 있죠 (막 1:8, 요 3:5, 행 1:5).

하지만 물이 머물러 있으면 강일 수 없습니다. 물이 밖으로 흘러 나가야 강이지요. 성경이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흘러나가는 강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가 한 곳에 머무를 수 없고, 계속 바깥으로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는 신앙이란 개인의 문제이기에, 결국 마음의 영역에서 끝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임재는 마음에 머물지 않고, 강이 되어 세상으로 흘러나간다고 말하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흘러나온 네 강은 실체였습니다. 계시록에 나온 보좌로부터 흘러나온 강도 미래에 실체로 드러나겠죠. 하지만 시편과 에스겔서의 강은 실체가 아닌, 환상입니다 (예루살렘에는 강이 없습니다). 즉, 역사는 강에서 시작해 강으로 끝나는데, 역사의 중간에는 강이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역사를 흐르는 강이 실제로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 7:38)

그렇습니다. 역사를 흐르는 강은 바로 우리 믿는 자의 삶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에게서 흘러나오는 강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강이고, 이 강은 세상으로 흘러나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강입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는 지극히 힘듭니다. 세상에서 신앙을 유지하고 살기도 힘든데, 세상에 생명을 주며 살기는 더욱 힘들죠. 하지만 세상에 생수를 흘러보내는 강의 역할은 우리에게 피할 수 없는 임무입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해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죠.

내일은 세상에 생수를 흘러보내는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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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분류없음 2007/12/27 20:52
"하나님은 아가페시다"라고 요한은 선포했습니다 (요일 4:8). 앞서 보았듯,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고, 완벽한 사랑이고, 모든 것을 뛰어 넘는 사람입니다. 아가페는 세상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는 사랑이고 (요 3:16),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고 (요 15:13),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롬 5: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우리에게도 아가페를 요구하십니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agapeo, 아가페에서 파생한 동사)"는 구약의 명령이 우리에게도 가장 중요한 계명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22:37).

문제는 우리 마음 속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냥 조금 사랑합니다. 정직하게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예배가운데 은혜를 받는다면 기뻐서 눈물을 흘리지만, 직장이나 가정에 어려움이 생긴다면, "하나님, 왜 나를 이처럼 괴롭히십니까?"하고 따지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아가페 사랑에서 너무나 먼 모습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바로 이러한 심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자신있게 말했지만 (마 26:33), 막상 유대인들이 앞에선 겁을 먹고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한 자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이 아가페였을까요? 그는 목슴을 바쳐서 에수를 사랑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상황이 좋을 때는 누구 보다 예수님을 사랑한 듯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예수님을 버리는 자였습니다.

이제 갈릴리에서 어부로 돌아간 그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베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아셨고, 베드로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깨달았죠.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5)

베드로는 이렇게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philos에서 온 동사)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5)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에 대해 물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 때문에 아가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는 필레오, 즉 친구의 사랑에 대해서만 말하지요.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친구로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완벽한 사랑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지요.

다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파오) (요 21:16)

베드로는 다시 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필레오) 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6)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필레오) (요 21:17)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는 예수님이 세번째에는 "사랑하느냐" (필레오)고 물으셔서 마음이 아팠다고 합니다. 그는 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필레오)주께서 아시나이다 (요 21:17)

결국, 예수님은 베드로의 수준으로 내려오시고, 그에게 다른 어떠한 주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가페를 표현할 준비가 되지 않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아가페가 없느냐? 왜 필로스밖에 없느냐?"고 꾸짖지 않으시고, "네가 필로스 밖에 없다면, 그것을 내게 다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기준은 높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러한 기준을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끼지요.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가 지금 있는 수준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우리가 살 소망이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 때문입니다. 바로 아가페의 마음이지요.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에, 내가 아무리 약하고 악한 자라도 그분께 나아갈 담대함을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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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페

분류없음 2007/12/26 17:28
히브리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로 쓰던 언어입니다. 따라서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언어 자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도록 발달하였지요. 예를 들어, 헤세드라는 단어는 단지 인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자들에 대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변함 없이 보이시는 특별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레미아가 멸망해가는 유다왕국을 향하여 "여호와의 헤세드가 무궁하다"고 선포하였을 때, 유다백성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망을 찾을 수 있었죠 (애 3:22).

그에 비해 헬라어는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그리스 사람들의 언어이고, 따라서 신약성경 저자들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발달한 헬라어라는 새로운 언어로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특히 신약 성경의 주제인 "사랑"이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표현하기가 극히 힘들었죠.

헬라어에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몆가지 있기는 하지만, 어느 단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에로스는 열정적인 사랑이면서 동시에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때로 극단적으로 이기적일 수 있지요. 스토르게는 가족적이며 따뜻한 사랑이지만, 강렬한 느낌이 떨어집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애정, 사랑인데, 절대적인 사랑에는 못미칩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70인역의 전통을 따라 agape라는 단어를 받아들입니다. 신약이 말하는 아가페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절대적인 사랑이지요.

아가페의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가페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아가페하자 아가페는 하나님께 속한것이니 아가페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아가페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아가페이심이라 (요일 4:7-8)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기에 그분의 행동도 아가페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아가페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아가페로 초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아가페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아가페하였으니 나의 아가페 안에 거하라 (요 15:9)

이처럼 하나님의 아가페를 받은 사람은 아가페를 실천하면서 삽니다. 아가페를 실천하는 삶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5)

하나님의 아가페를 마음에 품은 사람은 아가페의 성품을 보입니다. 바울은 아가페의 성품을 이렇게 말합니다.
아가페는 오래 참고 아가페는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아가페는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우리는 삶의 모든 행동을 아가페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너희 모든 일을 아가페로 행하라 (고전 16:14)
이 모든 것 위에 아가페를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골 3:14)

이웃을 대할 때도 아가페를 따라야죠.
아가페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아가페는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아가페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특히 그리스도인은 서로에게 아가페를 보여야 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아가페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아가페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요 15:12)

만약 우리가 세상을 아가페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를 떠난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아가페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아가페하면 아버지의 아가페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요일 2:15)

하나님은 아가페를 떠난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아가페를 버렸느니라 (계 2:4)

아가페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이 없이 이웃에게 아가페를 나누려는 시도는 늘 실패할 수 밖에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가페의 부족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아가페를 부어 주시기 때문이죠.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가페가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롬 5:5)

결국, 중요한 것은 아가페이신 하나님을 늘 만나고, 늘 그분의 아가페에 거하고, 늘 아가페를 바탕으로 사는 것이겠죠. 이것이 바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일 것입니다.
tags : 사랑, 아가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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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과 수단

분류없음 2007/12/25 16:12
제가 군대에 있을 때, 훈화 시간에 어느 장교가 군에 있을 동안은 종교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종교활동을 열심히 한 군사는 전투력도 좋다"는 말을 하더군요.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나 인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사람 죽이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찌 당황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꼭 그 장교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종교를 어떠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 자신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부모도 아이들은 "착한 사람이 되라고" 교회에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해외에서 한인교회는 단지 교회일 뿐이 아니라 교제, 사업, 쇼핑 등을 한 번에 해결하는 한인사회의 핵심이죠. 또 자녀의 입시가 다가오면 자녀를 원하는 대학에 합격시키기 위해 안 다니던 교회나 절로 나오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저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때가 많음을 느낍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 어려운 일이 벌어지면, 기도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이 실어하실 만한 일은 삼가다가, 중요한 고비가 넘어가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기도도 등안시 하고, 삶의 태도도 느슨해 지는 제 자신을 보게 됩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대상을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니, 재정적 어려움은 없어지겠지. 내 자식은 좋은 대학 들어가겠지" 하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목적이고, 다른 모든 것은 수단일 뿐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태도는 그러한 태도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을 때, 그분은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하셨으니, 그분에게 인간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죠. 진정한 사랑이란 늘 사랑의 대상을 최고의 목적으로 놓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 사랑을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겠죠.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심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는 하나님을 얼마나 내 인생의 목적으로 놓고 있는지 반성해 봅니다. 하나님이 날 무조건 사랑하시듯, 나도 하나님을 무조건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은 그분을 향한 사랑의 수단이길 원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깨끗케 하사, 세상을 향한 사랑을 모두 제거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그분이 기쁘게 거하실 거처로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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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Eliot, 동방박사의 여행 (Journey Of The Magi)

분류없음 2007/12/25 12:47
T.S. Eliot이 쓴 동방박사의 여행 (Journey Of The Magi)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T.S. Eliot은 많은 고민 끝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그는 이 시에서 자신이 신앙을 찾기까지 겪은 갈등과 번뇌를 동방박사의 고통스러운 여행을 통해 표현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만난 동방박사의 삶이 바뀌었듯, 자신의 삶도 바뀌었음을 고백하죠.

우리 구주 예수님이 나신 날, 그분의 죽음으로 생명을 얻은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Journey Of The Magi

'A cold coming we had of it,
Just the worst time of the year
For a journey, and such a long journey:
The ways deep and the weather sharp,
The very dead of winter'
And the camels galled, sore-footed, refractory,
Lying down in the melting snow.
There were times we regretted
The summer palaces on slopes, the terraces,
And the silken girls bringing sherbet.
Then the camel men cursing and grumbling
And running away, and wanting their liquor and women,
And the night-fires going out, and the lack of shelters,
And the cities hostile and the towns unfriendly
And the villages dirty and charging high prices:
A hard time we had of it.
At the end we preferred to travel all night,
Sleeping in snatches,
With the voices singing in our ears, saying
That this was all folly.

Then at dawn we came down to a temperate valley,
Wet, below the snow line, smelling of vegetation;
With a running stream and a water-mill beating the darkness,
And three trees on the low sky,
And an old white horse galloped away in the meadow.
Then we came to a tavern with vine-leaves over the lintel,
Six hands at an open door dicing for pieces of silver,
And feet kicking the empty wine-skins.
But there was no information, and so we continued
And arrived at evening, not a moment too soon
Finding the place; it was (you may say) satisfactory.

All this was a long time ago, I remember,
And I would do it again, but set down
This set down
This: were we led all that way for
Birth or Death? There was a Birth, certainly,
We had evidence and no doubt. I had seen birth and death,
But had thought they were different; this Birth was
Hard and bitter agony for us, like Death, our death.
We returned to our places, these Kingdoms,
But no longer at ease here, in the old dispensation,
With an alien people clutching their gods.
I should be glad of another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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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과 자본주의

분류없음 2007/12/24 12:31
저는 이 블로그 외에도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 (cimio.net)와 Vision & Logic (visionandlogic.net)
을 운영합니다. 이 블로그에는 광고를 달지 않았지만, 나머지 두 블로그에는 광고를 달았죠. 요즘 많은 블로그에 광고가 달렸지만, 저는 광고를 달면서 나름대로 대단한 고민을 하였습니다. 광고를 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행동인가? 사람들이 보고 시험에 들지는 않을까? 이런 질문이 머리속에 떠올랐죠. 물론 한 달에 광고로 들어오는 수입은 고작 하루나 이틀 통역으로 버는 돈보다 많지 않기 때문에 재정적 의미는 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내가 드러내 놓고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 자체는 대단히 부담스럽게 느껴졌죠.

그런데 저는 성경에서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았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봉급을 줄 것을 디모데에게 가르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딤전 5:18)

우리는 장로는 당연히 무보수 봉사직이라고 생각하지만, 바울은 장로도 열심히 일한다면, 당연히 월급을 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장로는 실제로 말씀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다는 점에서 (딤전 5:17) 오늘날의 장로보다는 목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죠. 즉, 그의 말은 "사역자는 사역의 댓가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블로그에 광고를 단 이유도, 블로그 운영에 들어가는 노력의 댓가를 일부나마 돌려받기 원해서였습니다. 많은 사람은 "인터넷은 무조건 공짜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는 성경에 나온 원칙은 아닙니다.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 지불이 성경의 원칙이지요. 물론 바울은 많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교회가 시험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죠. 만약 그가 교회를 세우자 마자 헌금을 거두어 떠난다면, 분명히 "저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전도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의심을 살만한 환경이라면, 바울은 돈을 받지 않았을 뿐입니다.

제가 얼마 안되는 돈을 벌면서도 마음이 꺼림직했던 이유는, 돈에 관한 교회의 뿌리 깊은 불신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많은 헌금을 거두어 예산을 집행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버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를 보입니다. 특히 사역자들 사이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많습니다. 물론 사역자가 본분을 잃고 돈벌이에 혈안이 된다면 잘못이지만,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 자체는 바울도 했던 일이고 (행 18:3, 살후 3:8), 오히려 바울은 범죄 활동으로 살아가거나, 일하지 않고 노는 사람에게 떳떳한 직업 (honest job)을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엡 4:28, 살후 3:11). 따라서 어떤 사람이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한 행동이지요.

하지만 이 말은 돈을 벌기 위해 미친듯이 일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근거로 하는 체제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사람은 그냥 돈을 벌기 원하지 않고, 엄청나게 돈을 벌기 원합니다. 옛날에는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는 "인간은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여유만 있으면 그 이상의 재물은 필요 없다"는 생각에서 나왔기에 자본주의 정신과는 다릅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많은 수록 좋다"입니다. 따라서 재산이 1천만 원인 사람은 1억을 가지도록 일해야 하고, 재산이 1억인 사람은 10억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자본주의 정신은 성경에서 위험하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 (딤전 6:10)라고 말했고, 감독이 될 사람은 "돈을 사랑치 아니하"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딤전 3:3).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고 경고하셨고, 돈을 사랑하면서도 주님을 따르려는 젊은이에게는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막 10:21)고 도전하셨습니다.

즉, 성경은 생계를 위한 노동은 격려하지만, 사치를 위한 노동은 경고합니다. 물론 어떠한 노동이 생계를 위한 노동이고, 어떠한 노동이 사치를 위한 노동인지는 자신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이미 돈이 많은데도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또는 남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또는 허영심 때문에, 또는 돈이 너무 좋아서 밤낮으로 일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본주의 정신과는 다른 정신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돈을 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입니다. 부자에 대한 성경의 경고 (마 19:23, 눅 12:21, 16:19-31, 약 1:9-10, 딤전 6:17)는 자본주의 사회속에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부자되세요" 같은 말이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과 어긋나는지 깨닫고, 하나님께 대해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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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연구] 은혜

분류없음 2007/12/22 16:11
구약에서 은혜라는 의미로 사용된 히브리 단어는 chen으로 69번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단어는 거의 늘 matsa라는 동사(에스더서에서는 matsa가 nasa로 대치되는 경우가 세 번 있다)와 함께 사용되어, '은혜를 입었더라'는 구절의 형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 경우 chen의 의미는, 한국어의 '좋게 봐줌, 예쁘게 봐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쁘게 봐주다'는 표현과 관련해서, chen이 문자적으로 예쁘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고운 것(chen)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즉, 윗 사람이 아랫 사람을 대할 때, 여러 명이 잘못해서 벌을 줄 때도, 그중 한 명은 착해서 그런 일에 참여할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는 벌을 주지 않을 것이고(창 6:8) 그런 사람이 부탁하는 것이면 거절하기 힘들어서라도 들어줄 것이다(삼하 14:22) 또한 이렇게 윗사람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은혜 받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묘사된다(창 32:5)

이렇게 비교적 단순하던 구약의 '은혜'라는 개념은 신약 시대에 와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말미암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4, 16-17)


율법을 어긴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 덕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의 복된 소식은 '은혜의 복음'(행 20:24)이라고 불리운다.

그러나 은혜는 죄인을 구원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칭의(justification)을 거쳐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을 통과하고 있으며, 언젠가 영화(glorification)에 이르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은혜는 칭의의 단계에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 단계 전체에 걸쳐 우리에게 주어진다.

  • 칭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 성화-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행 20:32)
  • 영화-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벧전 5:10)
은혜는 심지어, 바울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모태에 있을 때 부터 역사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갈 1:15)


Thayer's Greek English Lexincon은 은혜(charis)를 이렇게 정의한다

good will, loving-kindness, favour of the merciful kindness by which God, exerting his holy influence upon souls, turns them to Christ, keeps, strengthens, increases them in Christian faith, knowledge, affection, and kindles them to the exercise of the Christian virtues.)


은혜는 이처럼 죄인을 회개케 하고, 거룩한 삶으로 유도하여, 결국 죄로 인해 이룰 수 없었던 '하나님의 영광'(롬 3:23)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따라서 그분은 모든 신자의 삶 가운데 지금도 은혜를 베풀고, 즉 그분의 계획을 이뤄가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이러한 그분의 은혜를 받는, 즉 주님의 역사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그분의 계획 가운데로 이끈다. 그에 비해 우리의 잘못된 태도는 우리를 그분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만든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서 먼 삶을 살 때, 우리는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히 12:15)

그에 비해,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따라간다면, 우리의 마음은 믿음 위에 굳건히 서게 되는 것이다.

여러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3:9)

바울이 육체의 가시에 대해 기도하며 받은 응답의 말씀도 은혜에 관한 것이었다. 그가 육체의 가시로 인해 고통당할 때, 그래서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셨다.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지금 네게 충분한 은혜를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이 고통은 그가 회개하거나 영적전쟁으로 싸워 이겨야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의 한부분이라는 뜻이었다. 바울 자신이 설명하지만, 이 고통은 그가 많은 계시를 받음으로 인해 교만케 됨을 방지하기 위한 안전장치로서, 그에게 주어진 은혜의 한부분이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깨달은 것이다.

바울은 이처럼 그의 인생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기에,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즉,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형성된 삶을 살게 되었고, 그것이 감사하여 주를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이 일하였지만, 그러한 노력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의 삶에서 은혜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에,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서를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함으로 시작하였고, 특별히 고린도후서와 에베소서는 편지의 종결도 은혜의 강구로 끝맺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고후 13: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 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엡 6:24)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히 4:16)

우리가 그분께 은혜를 구할 때, 그분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분의 은혜는 우리의 인생을 향한 그분의 master-plan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지 순간의 어려움을 이겨낼 꾀가 아니라,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하고, 우리의 삶의 거룩하지 못한 부분이 제거되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은혜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면, 우리는 정말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 것이며,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어리석은 잘못은 그분의 은혜에 저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은혜가 우리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 귀중한 것이기에, 우리는 은혜를 받을 방법을 찾게 된다. 영어에서 'means of grace'(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청교도들은 많이 사용한 표현)이라는 것이 바로 이 '은혜 받는 방법'을 뜻하는 것인데, 성경 읽기, 기도, 경건서적 읽기, 예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즉 이런 일들을 행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고, '은혜로써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 때,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다음 구절을 살펴보자.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찌니 (히 12:28)


많은 유럽어에서 은혜는 감사와 동의어로 쓰인다(불어-merci, 이태리어-grazie, 스페인어-gracias 등) 그리스어에도 동일한 용법이 존재하는데, 여기서 '은혜를 받자'고 번역된 에코 카린(echo charin)이라는 구절은 눅 17:9에서 '사례하다'(즉, 감사하다)로 번역된 것과 같은 구절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은혜를 받자'는 말은, '감사하자'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실재로 NIV, NASB, NLT등 대부분의 현대 번역본들은 이 구절을 '감사하자'는 의미로 번역한다). 성경은 감사에 대해 많은 강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감사는 우리가 은혜를 받을 때만 가능하다. 은혜는 받지 않고, 율법적으로 감사만 드리려는 것은 결국 우리를 은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이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를 결국 그분의 영광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의 삶부터 영광에서 영광으로(고후 3:18) 변하여지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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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마음을 품은 사역자

분류없음 2007/12/21 21:00
제가 10년간 YWAM에서 간사 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프랑스에서 DTS 간사로 섬기던 2003년입니다. 이 때 우리 전도여행팀에 한 미국인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내게 매우 거친 말과 행동으로 대했고, 나는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에 대해 벌 받는 것 같아 매우 감정이 상했죠.

그가 나를 그렇게 미워한 이유는 내가 그의 아버지를 연상케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감정적으로 매마른 목사님이었는데, 나이가 아주 많았을 때, 그를 낳았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중년이 되어 낳은 아이를 어떻게 대해야 할찌 몰라 거리감을 두었고, 그는 버려졌다는 상처를 안고 자랐죠. 그리고 DTS에 와서 권위자인 나를 보니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의 감정이 몰려와 나를 미워할 수 밖에 없었지요.

저는 그 학생을 놓고 많은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따끔하게 꾸짖으면 정신을 차릴까.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마음을 터 놓고 부탁을 해볼까. 아니면 그런 사람이 없는 듯 무시해 버릴까... 그런데 하나님이 제게 "저 아이가 왜 네게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느냐?"라고 물으시더군요. 하나님은 "저 아이는 아버지로 부터 사랑을 못 받아 마음이 상하였고, 너라는 권위자를 만나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에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그는 내가 무조건 밉겠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아버지의 사랑을 향한 갈망이 너무도 크기에 뒤틀려진 행동을 하는 것이었죠.

그때 저는 사역에 있어서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올바르게 자라려면 사랑을 받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부족하고, 그러한 사랑의 결핍은 누군가 그 사람을 사랑하기 전 까지는 인생의 가장 커다란 문제로 남기 마련입니다. 그러한 사람을 사랑해 주는 것이 바로 사역자의 역할이겠지요 특히 요즘처럼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세대에게는 더욱 부모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간관계의 기본은 'give and take'였던 것 같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내게 잘 해주는 사람에겐 나도 잘해주고, 내 마음에 안드는 사람, 내게 상처주는 사람은 무시하고 멀리 했죠. 예전에는 그게 옳은 태도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특히 사역자가 사역의 대상자에게 사랑을 베풀 용의가 없다면, 이는 온전한 사역자의 태도가 아닐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오래 참음으로 자식이 성년에 이르도록 도와주듯, 사역자라면 아비의 마음을 가져야 사역의 대상이 자라날 수 있겠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스승은 많지만 아비는 여럿이 아니다. 너희 아비는 바로 나다'라고 말했습니다 (고전 4:15). 많은 교회를 세운 바울은 결국 그 교회들에 의해 다 버림 받고, 늘 외로움과 거절감과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아비의 마음'을 잃지 않았고, 그렇기에 자신있게 '나는 너희의 아버지다'고 말할 수 있었죠. 제가 계산적인 태도로 학생들을 대한다면, 제 감정은 보호가 되고, 사역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배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점에서 프랑스 DTS에서 겪은 힘든 경험은 하나님이 제게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시고자 특별히 준비한 귀중한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더욱 성숙한 마음을 품기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사역의 대상을 포용하고, 감싸주고, 그들이 성숙하도록 인내로 도와주는 자가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가능토록 은혜를 주시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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