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분류없음 2008/03/23 12:44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제가 여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여행을 좋아하리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저는
여행을 싫어합니다. 저와 함께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제가 얼마나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며, 때때로
하루종일 같은 장소를 떠나지 않는지 직접 목격했을 것입니다. 여행을 좋아하진 않지만, 94년에 혼자 유럽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저는 운명인 듯 수많은 곳을, 그것도 대부분 혼자서 여행했습니다. 처음에는 여행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라 봐야 될 것을 못보고 지나치기도 했고 (제가 최초로 방문한 유럽도시인 던 런던에선 그 유명하다는 빅벤, 런던브리지, 버킹검 궁 등을 전혀 못 보았습니다), 돈 아낀다고 밤기차만 타다가 폐인의 삶을 경험하기도 하고... 뭐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엉성한 실수를 많이하고
다녔죠. 그래서 요즘은 여행을 다닐때, 지금까지 익힌 모든 여행 지식을 최대한 발휘해서 가장 효율적이고도 쾌적한
여행이 되도록 신경을 많이 씁니다. 예를 들어, 여행을 할때는 베낭보다는 바퀴가 달린 가방이 유용하다던지, 숙소는 조금 비싸도 관광 중심지에 있는 곳에 위치한 것이 결국 더 경제적이다 (외곽에 있는
숙소까지 가려면 차비가 들기 때문에)는 등 체험으로 터득한 수많은 지식에 의존해서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게 되죠. 그런
데 이렇게 경험을 살려 여행을 하면 점차 여행하기가 편해져야 하는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사람이
나이가 드니까 더 편한 것을 찾게 되고, 따라서 20대 초반에 여행할 땐 당연히 감수해야할 불편으로 생각하던 것들이 이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쾌로 느껴지게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여행할 때 늘 유스 호스텔만
이용했습니다. 유스호스텔은 대부분 기숙사 형태로 한 방에 많은 침대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 숙소에 머무는 것이 정말 힘든 일로 느껴지더군요. 우선 여러 사람이 방을 쓰니까 privacy가 전혀 없는 것은 당연하고, 잠자고 일어나는 시간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야 하고, 많은 경우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이 심한 몸냄새가 나기 때문에 (서양 사람들 원래 체취가
강한데다가, 여행하고 안씻고 자는 사람들이 많아서) 거의 방에 들어가기가 싫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Youth
Hostel에서 자는 것이 가장 싼 호텔의 싱글 룸에서 자는 것보다 반 값 정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Youth
Hostel에 머무는 경우가 많죠... 이탈리아 페루자에 머물다가 튀니지로 비자 여행을 갈 때도 그랬습니다. 튀니지로 직접 간 것이 아니라 로마,
나폴리, 시칠리아를 거쳐서 시칠리아에서 배로 갔는데, 로마와 나폴리에서는 유스호스텔을 이용했습니다. 뭐 나름대로 괜챦은
유스호스텔들이었는데, 위에서 언급한 어려움들 때문에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특히 privacy가 없으니 자연히 묵상,
기도등 경건의 시간 갖기도 쉽지 않더군요. '이제 성경 읽어야지'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불끄면 그만이고, 기도하려고 해도 다들
깨서 떠들면 기도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연히 경건의 시간이 흔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며칠 지내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우울해 지더군요. '아, 나는 왜 이 나이가 되서도 이렇게 싸구려 여행을 해야 하는 걸까? 왜 나는 다른 사람들 처럼 호텔에서
우아하게 자면 안되나? 왜 나는 늘 혼자서 다녀야 하는 걸까?' 로마에서 바티칸 박물관도 가보고, 나폴리 근처 폼페이 유적도
방문했지만, 마음은 계속 어두웠습니다. '나는 왜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나? 언제까지 이렇게 떠도는 인생이어야 하는가...' 나폴리에서 시칠리아까지는 기차로 이동하기로 했습니다. 원래는 밤기차를 잘 안타는데, 워낙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서 어쩔 수
없이 타게 되었습니다. 제가 탄 기차는 로마에서 나폴리를 거쳐 시칠리아로 가는 기차였습니다. 기차가 나폴리에 도착했을 때, 차안은 사람이 가득하더군요. '혹시 자리를 잡지 못해 밤새 서서 가면 어떻하나'
생각하니 바짝 긴장이 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칸 한칸 앞차로 옮겨가며 자리를 찾았습니다. 상당히 앞까지 갔을 때 겨우
빈자리 하나를 발견하고 앉았습니다. 그러나 안심도 잠깐, 검표원이 표를 보더니 '이 차량은 팔레르모로 안가니 팔레르모에 가려면 뒤쪽으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기차가 중간에 갈라져 한쪽은 시라쿠제로 가고 한쪽은 팔레르모로 가게 되어있던 것입니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이태리 반도 남쪽 끝에서 배에 기차를 싣게 될 때 까지는 앉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잠시나마 눈을 붙여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기차가 정차해
있는데 움직일 생각을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아, 여기서 기차를 배에 싣는구나' 생각이 들더군요. 세벽 한시.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겨 뒷쪽으로 옮겨갔습니다. 칸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 사람들, 자리는 없고, 더욱 불안하게 만드는 건 복도에 서있는
사람들... '사람들이 이렇게 서있는데 자리가 있겠나' 싶더군요. 한참을 가다가 포기하고 복도에 있는 간의 의자를 내려
앉았습니다. 이렇게 라도 가야겠다... 싶어서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 봤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자는 말 그대로 간의의자라 쿠션이 하나도 없어 앉기가 매우 불편했고, 발과 엉덩이 외에 몸을 지탱해주는 부분이
전혀 없었고, 무엇보다도 머리를 기댈 곳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기댈 곳이 없으니까 잠을 전혀 잘 수가 없더군요. 막
괴로워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아, 머리둘 곳의 중요성을 그렇게 절감해 보긴 처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그렇게
잠못 이루어 고생하던 시간은 바로 고난 주간의 금요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새 고초를 당하고, 엄청나게 매를 맞고, 못먹고,
못자고, 이제 십자가에 달리시는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내 신세에 대해 한탄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머리둘 곳이 없음을 말씀하신 것은, 어떤 서기관이 책임지지
못할 헌신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마8:19) 그 서기관은 아마도 예수님을 보며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댓가 지불은 고려하지 않고 헌신의 멋있는 모습만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그런 식의 헌신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고, 오히려 만류해야 하는 종류의 헌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삶이 사실은 얼마나 힘든가를 극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던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한국에 있을 때, 여러번 헌신에 관한 설교를 했던 생각이 납니다. 때로는
학생들이 '헌신'이라는 주제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정말 마음을 담아 가르칠 수 있는 주제는
이것뿐이다'는 심정으로 헌신에 대해 강의하고, 헌신하도록 도전했습니다. 헌신이 많은 댓가지불을 요한다는 것은 저
자신의 삶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96년 영국에서 머물 시간이 다 끝났을 때, 전 한국에 돌아가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프랑스의
베이스와 접촉하게 되었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꼈기에 내 계획을 포기하고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의 재정상태는 정말 바닥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잠시 영국에 있을 생각으로 나왔기 때문에, 프랑스에
체류할 재정은 전혀 없었습니다. '과연 프랑스에 건너가면 무슨 돈으로 사나?' 하는 질문은 저를 괴롭혔습니다.
몇년 전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완전히 가세가 기운 상태에서 몇년을 살다 보니, '생존'이라는 것은 대단히 절박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98년 한국에서
간사로 위탁하기전에도 사정은 비슷했습니다. 이제 대학을 거의 마치고,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간사를 하게
되면 가정에 도움을 못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저 자신도 다시 한 번 생존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였던 것입니다. 그나마 학생때는
아르바이트 하면서 용돈이라도 벌어 썼는데, 간사를 하게 되면 그나마 수입이 없어지고, 어떻게 먹고 살지가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
때 제가 늘 묵상하던 것은 감옥에 갇힌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감옥에선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감옥은 사람을 가둬두기만 하는 곳이었고, 음식은 죄수의 가족이 공급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는데, 그와 관련있던 모든 교회, 개인들이 그를 잊었다고 나옵니다. 즉, 바울은 감옥에 갇혀
꼼짝 없이 굶어죽게 생겼다는 것이지요. 이 모습을 보며, '정말 바울도 나랑 상황이 비슷했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빌립보서에는 바울의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4:13) 그런데 그는 바로 앞구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4:12)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가난도 이겨낼 수 있고, 부유해도 타락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누군가가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는 형편인데도 '내가 비천에 처할줄도 알고...'라고
했다는 것은, 간사 초년생인 저에게 참 많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아, 나의 경제적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바울은 정말
굶어죽는 위기 앞에서도 '기뻐하라!(4:4)'고 말할 수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지금은 프랑스에 있을 때나
한국에서 처음 간사생활을 할때에 비하면 훨씬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금만 생활의 질이 떨어져도 하나님 앞에서
불평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체우겠다'(골
1:24)는 바울의 말에 무한한 감동을 느끼던 이전의 제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고, 안락한 삶만을
추구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 또한 체험할 수 없게될 것입니다. 바울의 말대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은
분리될 수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고난을 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그분의 부활의 권능 또한 누리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17
분류없음 2008/03/09 11:41
비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는 근거로 쓰는 말 중, "그리스도인은 교만하고 일방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이 있고, 따라서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진리를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기가 쉽지요.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교만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마련입니다.
진리를 안다고 꼭 교만할 필요는 없지만, 많은 그리스도인은 실제로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자가 많은 미국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동성애에 대한 비난을 쏟아놓으며 "동성애자는 지옥간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혐오한다"는 말을 하길 좋아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동성애자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주신 것은 우리가 남을 판단하기 위함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우선 우리 자신이 진리를 따라 살기 위한 것입니다. 세상은 진리를 모르고,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많은 잘못이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정죄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에 대해 귀를 막을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합니다 (요 1:14). 우리는 진리를 말할 뿐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엡 4:15).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사랑이 없이 말한다면 듣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진리와 함께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아무리 진리를 말한다 할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은혜와 진리를 함께 보이는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8
분류없음 2008/03/02 18:53
사람들은 야곱에 대해 생각할 때 "사기꾼"의 이미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는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뺏은 인물로 유명하고, 따라서 각종 술수에 능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합니다.
하지만 이는 성경이 말하는 야곱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성경은 야곱에 대해 "조용한 사람" (창 25:27 개정개역)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이익에 밝은 사람이 아니라 조용히 장막에 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사기꾼의 모습과는 매우 다릅니다.
야곱은 장막에 거하며 아버지가 들려주는 가문의 전통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이삭은 그에게 하나님이 갈데아 땅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큰 민족을 만드실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약속을 타고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특권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해 설명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이삭의 설명을 듣고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그리고 장자인 에서형에게 이어지겠구나.' 그는 생각했겠죠.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누리기 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에서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 몇 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신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기회가 옵니다. 그 기회는 그들이 살던 지역에 기근이 든 것이죠 (창 26:1). 에서는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기근 때문에 사냥감을 찾지 못하고 허기져 돌아옵니다. 야곱은 장막에 거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남은 식량이 어디있는지 알았고, 이 식량으로 죽을 만듭니다. 시장했던 에서는 야곱의 팥죽을 보더니 "나에게 달라"고 요구합니다. 야곱은 "그러면 대신 장자의 명분을 나에게 달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배고파 죽겠는데 장자의 명분이 무슨 소용 있겠냐"며 순수히 거래에 응합니다. 이로 인해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얻고 에서는 죽 한 그릇을 얻습니다. 성경은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창 25:34).
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특권을 타고 났지만, 이러한 귀중한 특권을 팥죽 한그릇에 팔아 버리고도 전혀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가 철저하게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영적인 일의 가치를 모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 묵상,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 성도간의 교제, 섬김, 전도 등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배고파 죽겠는데 영적인 활동이 무슨 소용 있겠냐"며 육신의 쾌락만을 추구하고 영적인 유산을 팔아버리지요. 성경은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지 않도록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고 경고합니다 (히 12:16).
영적인 유산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입니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유산은 육신의 쾌락을 포기하는 댓가를 지불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야곱이 선택한 길이었죠. 그에 비해 육신의 쾌락을 선택한다면 영적인 유산은 잃기 마련입니다. 이는 에서의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롬 9:1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야곱처럼 육신의 쾌락을 포기하고 영적인 유산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에 비해 육신의 쾌락을 위해 영적인 유산을 포기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없습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7
분류없음 2008/02/24 12:41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를 입어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전하여 모든 민족이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롬 1:5 표준새변역개정판).
한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면서, 늘 존재했지만 경험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한가지 문제를 자주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것인데, 쉽게 말해 내가 선교사인가? 하는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될지 애매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교사인지를 결정하려면, 우선 선교사의 개념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이를 위해선 선교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선교와 선교사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다 보니까 생각했던 것 보다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하다는 것이 명확해지더군요. 윌리엄 캐리가 근대 선교를 시작한 이후로 유럽은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고, 아프리카, 인도, 중국은 선교사가 필요한 나라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에 가기 위해 배를 타면 짧아도 몇주, 길면 몇 달이 걸렸기 때문에, 선교사로 간다는 것은 거의 평생 현지에서 선교사로 산다는 뜻이었고, 실제로 많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묻혔습니다. 이러한 시절에는 선교사의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즉, 선교사는 유럽, 또는 미국을 떠나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가서, 여러해 동안 현지에 머물며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가 되면 이러한 선교사에 대한 정의가 대단히 흔들리게 됩니다. 우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러한 지역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가 늘어났습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유럽이 복음에서 떠나면서 서양도 선교사를 보낼 뿐 아니라 선교사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서양 선교사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전도하는 것이 선교'라는 개념은 완전히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선교는 타문화 사역'이라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타문화 대상 사역이라고 해도, 어떤 한국 분이 안산공단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경우 보통 그런 분을 선교사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외국에 가서 타문화권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선교'라는 정의가 가능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도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전도가 선교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전도가 아닌 다른 사역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예를 들어, 어떤 분들은 사무실 행정을 보고, 어떤 분들은 시설을 관리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는 안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기도 하고, 어떤 분들은 우물을 파서 물문제를 해결하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은 전도는 아닌데, 이런 일을 하는 분들도 선교사입니까? 아니면 이런 일은 전도가 아니니까 선교사가 아니라고 해야 합니까? 또 한가지 문제는, 외국에서 타문화권에서 전도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나 호주, 유럽에 가있는 선교사를 선교사로 인정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이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같은 살기 좋은 나라에서 사역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교학계에서 선교지를 경제수준에 따라 구분하는 일은 없지만, 일반인에게 선교지란 곧 가난한 지역이고, 따라서 복음화율이 아무리 낮아도 경제수준이 높다면 선교지가 필요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18세기 유럽 식민지 시대의 선교 모델과 가장 비슷하고, 따라서 지금도 가장 설득력 있는 개념은 바로 10/40 창일 것입니다. 10/40창 지역은 대체로 가난하고, 대체로 복음을 전하는데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다는데서 과거의 위대한 선교사들이 어려움을 뚫고 선교를 했던 모습에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러한 10/40창을 이용한 정의도 꼭 현실에 적합한 것많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10/40창에서 선교하는 사람만 선교사라면, 남미 선교사는 다 선교사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선교사도(남아공에서 케냐까지) 10/40창 선교사는 아닙니다. 만약 10/40 창 안에 선교하는 분만 선교사라면 그런 분들은 갑자기 선교사 지위를 박탈당하는 황당함을 경험해야겠죠. 그와 함께 질문하게 되는 것은, '왜 우리는 18세기 선교사의 개념을 세상이 변한 21세기에 적용하려 하는가?' 입니다. 뭔가 우리 실정에 맞는 선교사의 개념을 찾으면 안될까요? 만약 10/40창 지역의 선교사를 올바른 선교사의 모델의 척도로 삼는다 하여도, 그분들의 상황은 18세기의 선교시대와는 매우 다릅니다. 우선, 항공여행의 발달로 어느 나라나 24시간 내에 갈 수 있는 상황에서, 선교사들도 원한다면 자국으로 몇번씩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많은 분들이 본국과 선교지를 자주 오갑니다. 그러는 것이 사역에 더 도움이 될 경우도 많죠. 그리고 부유한 선교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개념도, 남미 출신의 가난한 선교사가 일본에 와서 사역하는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죠. 오늘날 선교사의 정의를 어렵게 하는 또다른 요인은, 단기 선교의 확산입니다. 앞서 말한 항공 교통의 발달로 선교지를 오가는 일이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 선교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단기 팀의 구성원까지 선교사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이렇게 단기 여행을 하고 난 후, 현지에 대한 마음을 사고 현지로 돌아가 2-3년 정도 사역하는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선교사는 최소 20-30년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오늘날의 선교사는 현지 경험이 2-3년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비거주 선교사(non-residential missionary)'는 현지에서 매우 짧은 경험만 있어도, 그 이후 본국에서 현지를 위해 일하고 선교사로 인정이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선교가 대중화 되면서, 선교사의 개념조차 민주화가 되어서, 이제는 가는 사람이 선교사일 뿐 아니라, '보내는 선교사'도 인정이 됩니다. 그리고 선교 동원가도 많은 경우 선교사로 인정이 됩니다. 몇몇 유명한 교계 지도자는 거주지가 한국인데도, 가끔씩 해외에서 사역을 한다는 이유로 '선교사'라는 직함을 쓰더군요. 그에 비해 교계 지도자가 아니면 그러한 "선교사"와 동일한 사역을 해도 선교사라는 명칭을 쓰지 못하더군요. 그렇다면 선교사는 무엇일까요? 선교사(missionary)는 선교(mission)를 하는 사람이겠지요. 영어의 mission이라는 말은 라틴어의 missio에서 왔고, 이는 곧 동사 mittere(보내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mission은 어원을 따졌을 때, '보냄'이랄 수 있겠고, missionary는 '보내진 사람'이랄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어로 사도를 뜻하는 apostolos라는 단어도 '보내다'에서 온 말이고, 따라서 사도는 '보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선교사라는 단어는 사도라는 단어와 가장 가깝다고 말해도 되겠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선교사는 없고 사도만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에 나오는 다섯가지 직임에도 선교사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선교사'의 개념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 18세기 유럽의 특수 상황이 만들어낸 산물입니다. 그렇다면 선교의 성경적 기초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이 열방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수차례 언급합니다. 창세기에 인간을 창조하시며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던 것이나, 아브라함에게 '너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나, 시편2편에서 '구하라 열방을 네 유업으로 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나 모두 이러한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열방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나 천년의 기간 동안 복음은 유럽에 같혀 전혀 유럽 밖으로 전파되기 못하였습니다. 윌리엄 캐리와 함께 시작된 근대 개신교 선교는 이러한 하나님의 열방을 향한 마음의 표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하나님은 계속적으로 열방을 자신의 뜻대로 바꾸기 위하여 믿는자들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열방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하지만, 이는 전도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나라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요, 각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그것을 위한 시작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사회가 복음을 모르면 그 사회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을 드리는 일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교란 단지 전도가 아닌, 전도와 사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되는 장소로 바꾸어 놓는 일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요즘 YWAM에서 많이 노력하고 있는 지역사회 개발이나 식수 개발 사역도 선교에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고아원이나 학교도 마찬가지구요. 심지어는 로렌 커닝햄의 아들 데이비드 커닝햄이 헐리웃에서 감독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영화계를 바꿔놓는 일을 한다고 할 때, 그도 어떤 선교사 만큼이나 하나님이 보내신 일을 감당하는 자라고 볼 수 있겠죠. 바울은 로마서 1장 5절에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모든 민족이 그 이름을 믿고 순종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모든 선교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봅니다.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야 말로 성경이 말하는 선교이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선교사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선교사라는 명칭을 여전히 18세기 기준에 맞춰 사용하는 형편이고 보면, 저를 포함한 열방에서 주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을 일컬을 다른 명칭을 찾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래서 '열방 사역자', 또는 우리 말을 넣어서 '열방 일꾼'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바울이야말로 최초, 최고의 열방 사역자 아니겠습니까? 근대에는 윌리엄 캐리나 허드슨 테일러도 열방 사역자였고, 오늘날 열방에서 주의 일을 하는 분들도 다 열방 사역자일 것입니다. 시대에 맞게 열방을 주께 돌아와 주님을 믿으며 주께 순종하게 하는 일, 그것이 바로 열방 사역자, 열방 일꾼들의 할 일이고,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열방 사역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주를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Trackbacks 1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64
분류없음 2008/02/17 13:05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명령하십니다 (창 1:28). 하나님은 인류의 죄악을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도 노아와 그의 자손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창 9:1). 이 명령에 따르면 인간은 온 땅에 퍼져 황무지였던 세상을 동산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죄악에 물든 인류는 하나님의 명령 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살기 원했고,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고 맙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지요.
창세기 11장에는 동쪽으로 여행을 하다가 시날 평지에 다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날 평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훗날 메소포타문명이 꽃피는 곳입니다. 이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평평하며 티그리스와 유프라데스 강의 물을 농사에 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 정착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입니다.
문제는 이 지역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 지역이 너무 좋은 나머지, 그 지역에 정착할 생각만 하고 "땅에 충만할" 생각을 안 한 것이지요. 즉, 아무리 시날땅이 좋고 그곳에 정착하고 싶어도, 그들의 대다수는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어야 하는데, 그들은 모두 시날땅에 주저 앉으려 했던 것이지요.
그들이 탑을 쌓은 이유는 그들의 자손까지도 시날땅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들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시날땅이라는 평지에 탑이 우뚝 솟으면 사방에서 이 탑을 쉽게 볼 수 있고, 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기 마련이죠.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삼았다면 사방으로 퍼졌을 텐데, 이들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고 자신과 자손이 모두 가장 살기 좋은 땅에서 천년 만년 잘먹고 잘살기만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들의 언어를 흩으심으로 이들이 더 이상 한 곳에 모여살지 못하고 전세계로 퍼지도록 하셨죠. 하나님의 뜻을 어기려던 이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입 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를 삶의 가장 우선순위로 정해야 하죠.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의 편안과 행복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삽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우리에게 슬픔과 좌절만을 안겨줍니다.
아무리 욕심 나는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멈추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는 죄를 피하는 비결입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6
분류없음 2008/02/10 12:37
장인이 제품을 만들 때, 그는 이 제품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생각하며 만들 것입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한 것이고, 종이는 그 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고, 벽돌은 건물을 짓기 위한 것이지요.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도 이러한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1장에 나온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으로 하여금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창 1:26). 하지만 인간은 타락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고후 5:17). 그가 만드신 신인류가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이지요.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즉,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선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이는 선하신 하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온 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하시기에, 그분의 뜻을 따른 일은 모두 선한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고, 가정을 돌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을 돌보는 일 등이 모두 선한 일이지요. 하나님은 우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이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빌 1:6). 우리는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골 1:10). 하나님의 사람은 모든 선한 일에 대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딤후 3:17).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함입니다 (딛 2:14). 그리고 우리가 선한 일을 행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빛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마 5:16). 지금 당신이 있는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는 선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지금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기 원하는 일입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5
분류없음 2008/02/06 23:19
성경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창 1:1). 땅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의 세상이고,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마 6:9).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도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이 세상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늘에서 멀고, 우주선을 타고 한참을 날아 가야 할 수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찬송가에 나오는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라는 구절은 이러한 사고를 표현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늘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닙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하나님의 모략 (Divine Conspiracy)에서 "하늘은 바로 공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우리는 보통 공기는 하늘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공기도 하늘로 본다는 것이지요. 만약 하늘 나라가 저 먼 우주 바깥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바로 지금 하늘 나라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늘은 물질 세상 속에 숨은 영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땅위에 살 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 가운데 하늘 나라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가 물질 세계에 집중을 하고 산다면, 우리는 물질 세계만 인식하겠지만, 하늘 나라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하늘 나라를 일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로렌스 형제가 쓴 "하나님의 임재 연습"은 바로 이러한 개념을 담은 책입니다. 그에겐 일상의 삶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였고,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 위해 노력을 하며 살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동일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무척 슬픕니다. 우리는 땅에 살 뿐 아니라, 땅 위에서 하늘 나라를 위해 하늘 나라를 경험하며 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하늘 나라를 멀지 않습니다. 매 순간의 삶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이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늘 나라임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4
분류없음 2008/02/02 22:17
많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은 즐거움을 누리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신앙생활은 의무의 연속이고, 하기 싫은 일을 참고 하는 삶을 뜻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엔 즐거움이 가득해야 정상입니다. 물론 이 기쁨은 세상의 방탕한 즐거움과는 다릅니다. 세상의 즐거움은 타락한 육체의 본성을 따를 때 오지만,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옵니다.
영화 "불의 전차"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자 국가대표 육상선수입니다. 그는 극중에서 "나는 달릴 때 하나님의 기쁨 (pleasure of God)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은 세상을 보시며 "좋았더라"고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즐거운 마음으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세상을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읽으며, 멋있는 석양을 보며,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지요. 또한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직업을 가질 때, 그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 즐거운 일이 많은데도 그리스도인이 늘상 찡그린 얼굴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3
분류없음 2008/01/29 12:21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6) 하나님은 지상에서 하나님 대신 만물을 다스릴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인 것이지요. 따라서 모든 인간은 원래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타락한 후, 인간은 하나님의 종의 자리에 있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자신의 뜻을 따라 살기 원했기 때문이지요. 여기서부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실천하는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인간에게 돌아온 것은 공허와 좌절 뿐이었습니다. 세상은 "행복"을 미끼로 인간을 유혹합니다. "네가 이렇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세상이 말하는 대로 돈이 많고, 유명하고, 권력이 많은 사람은 매일매일이 즐겁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돈도 많고 사랑도 많이 받는 연예인들은 결국 불행에 찌든 모습을 드러내 팬들을 실망시킬까요?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살기 힘들어질수록 인간은 더욱 행복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는 많은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공감대가 점차 커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행복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오직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마 6:3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할 때 (마 6:10), 우리의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2
분류없음 2008/01/24 14:14
저는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의 말씀에 나온 진리를 나누기 좋아합니다. 특히 여러 사람들 앞에서 강의를 통해 진리를 전달하기 좋아하죠. 하지만 제가 강의할 기회는 극히 적습니다. 특히 강사가 부족한 외국 보다, 강사가 넘처나는 한국내에서는 더 적은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고, 왜 나는 강사로 인정받지 못할까를 고민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강의를 할 기회가 적었던 것은 나름대로 내게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강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길을 찾았고, 그 결과가 블로그 운영이었습니다. 작년 10월말에 세상을 바꾸는 블로그를 공개했는데, 2개월의 활동만으로 올블로그 탑 100 블로그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블로거뉴스의 베스트 블로그 기자에 뽑히기도 했죠. 앞으로도 블로그 운영을 열심히 한다면 강의를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 보다 훨씬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본다면 저는 옛날 부터 새로운 형식의 사역을 하기 원하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에서 썼듯, 시대가 변하면 사역의 형식도 변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죠. 그런데 강의는 새로운 형식은 아닙니다. 제가 만약 강사로 인정받는 사람이었다면, 옛 형식에 안주하고 말았겠죠. 그러고 본다면 강사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정말 "blessing in disguise" (변장한 축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삶의 많은 어려움은 사실 우리를 돕는 귀중한 보배와 같습니다. 우리는 먼 미래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앞의 어려움을 보며 괴로워합니다. 하지만 멀게 볼 때, 우리의 삶은 감사할 조건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야 말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 5:18). 우리는 많은 상황에서 감사하기 보다는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할 때, 우리는 어려움의 의미를 발견하고 더욱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Trackbacks 0
:
Trackback Address :: http://fruitfullife.net/trackback/91
|